안산 이야기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5번 출구) 옆쪽에 자리잡고 있는 안산.
서울 도심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곳 중에서도 손꼽힌다.
더군다나 2013년 11월에 개통된 안산 자락길은
산을 잘 오르지 못하는 초보자도 가볍게 올라 산림욕을 즐기며 편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순환형 무장애 숲길’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무장애 숲길 중 오르내리는 ‘편도형’이 아닌 ‘순환형’으로 완공된 숲길은 전국에서 처음이다.
안산의 유래
무악재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접해있어 무악재의 모습이 말의 길, 즉 안장처럼 보여 안산(鞍山)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산의 높이는 나지막하지만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길목인 무악재와 한국 태고종 본산인 봉원사,
한국 역사의 아픔이 간직된 서대문형무소, 독립문이 산자락에 흩어져, 역사의 이야기를 화수분처럼 쏟아진다.
독립문역 5번 출구에서 산행을 시작할 때는 서대문형무소가 있는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등에서 역사체험을 할 수 있고,
무악재역 3번 출구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독립운동가의 사진과 활동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군사적 요충지 인왕산의 견인차 안산
안산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가 있다. 봉수대(烽燧臺)는 밤에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봉과
낮에 불을 피워 연기로 신호를 보내는 수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인왕산 자락에 이어진 안산은 인왕산의 역할을 함께 나누어 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해 1994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봉수대 근처에 전망대가 있는데, 청와대부터 동대문 근처의 성곽이 한 눈에 펼쳐진다.
안산과 얽힌 역사 이야기
1. 안산은 조선왕조의 법궁 주산이 될 뻔한 곳이다.
하륜이 새 왕조의 도읍으로 무악산 주산설을 주장하다가 툇자를 먹었다.
여기가 풍수지리상 최길지라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터는 안산을 주산으로 하면 궁궐자리는 연희동 밖에 없는데,
당시 경복궁만한 대궐이 들어가기엔 턱없이 좁은 땅이었다고~
더군다나, 방향도 정남은 못하고, 서남쪽으로 뒤틀어야 한다.
결국, 북악산 밑 더 널찍하고 평탄하고 좋아 보인 경복궁이 궁궐터로 확정된 것이다.
2. 안산은 이괄의 난(1624년 인조2년)의 안현전투의 현장이다.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때에 제주목사, 함경도 북병사(北兵使) 등을 지낸 이괄(李适, 1587~1624)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공신들은 이괄을 배척하고 견제해
논공행상(論功行賞) 과정에서 이괄에 대한 포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반정 이후 2달여 만에 후금(後金)이 침입할 우려가 있다 해 관서(關西)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괄은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마음을 달래고 있던 와중인 1624년 이괄이 역모를 꾀한다는 신고가 접수!
한양에서 이괄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된 인물들이 잡혀가 문초를 받았고,
공서파(功西派)의 영수인 이귀 등은 이괄도 잡아다 문초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이를 승인하지 않자, 그 대신 이괄의 아들인 이전(李旃)을 한양으로 압송해 오도록 하였다.
이에 분노한 이괄은 3월 13일(음력 1월 24일) 아들을 압송하러 온 금부도사와 군사 등을 죽이고,
9천의 북방기동대 정병을 이끌고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 소식이 도성에 전해지자 이괄의 아내와 동생 등을 처형해 사태가 더 심각해진다.
(이괄은 반란을 일으킨지 17일만에 한양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이성계 이후로 조선 최고의 지상전 야전 사령관으로 꼽힘)
이괄의 군대가 예성강을 건너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인조는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한양을 떠나 공주로 피난.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선조의 아들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했다.
정부군은 먼저 안산의 봉수대를 기습 점령하고 평상시처럼 봉화를 올렸다. 그리고 밤 사이 병력 배치를 마쳤다.
때문에 안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토벌군에 크게 패한다.
이괄은 한밤중에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광희문(光熙門)을 통해 경기도 이천(利川)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4월 1일(음력 2월 14일)에 경안역(慶安驛) 부근에서 부하에게 살해되면서 이괄의 난은 실패로 끝난다.
태고종의 총본산 봉원사
이대 후문 방향에 있는 안산 자락에는 봉원사(奉元寺)라는 천년 고찰이 있다.
한국 불교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 진성여왕 3년(88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부유한 신도의 집을 희사 받아 반야사(般若寺)란 이름으로 현 연세대(연희궁) 터에 창건 되었다.
그러던 봉원사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보우 스님이 크게 중건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 하였고
조선 후기 영조에 의해 지금의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졌다고 한다.
그 이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던 것을 지인대사가 중건했고, 한국전쟁 이후 소실된 것을 중건한 것이다.
봉원사 한 가운데는 대웅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8호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91년 다시 지어 단청이 뚜렷하고 화려하다.
대웅전 옆쪽으로는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아소정 본채 거물을 옮겨 지은 염불당이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산호벽루(珊湖碧樓)와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행서체현판 무량수각(無量壽閣)도 있다.
부엌문의 신장도는 인간문화재 이만봉 스님의 작품이다.
대웅전 오른편에는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9년여에 걸쳐 만들어진 삼천불전이 위치해있다.
또한 대웅전 위쪽으로 올라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위패를 모신 불당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와 교육을 위해 1908년 만들어진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가 창립된 장소로
내부에는 미륵불 입상이 봉안돼 있다.
봉원사와 관련된 인물들
봉원사에는 독서당이 있어 조선 시대 선비들이 과거 공부를 위해 용맹정진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스무 살 때 윤영(尹映)이라는 기인을 만나 소설 《허생전》의 소재를 얻은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이동인 스님
갑신정변(1884년)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 스님.
봉원사에서 5년간 머물며 포교했다 전해진다. 그래서 봉은사는 갑신정변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삼천불전 옆에 있는 이동인 선사의 수인상(手印像)이 있다. 수인상은 존귀한 분을 모신다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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