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약 한시간 거리라고 말하지만,
사실 양주의 회암사지박물관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찾아가면 한 시간이 아니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족히 2시간은 걸린다. 특히 1호선은 배차 운이 좋아야 한다.
의정부까지는 웬만한 1호선 지하철이 다 가지만, 소요산행은 배차 시간이 꽤 길었다.
양주 회암사지박물관까지 들어가는 버스가 있는 덕정역까지 가려면 소요산행을 타야 한다.
덕정역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버스 8번을 타면 회암사지 박물관 앞까지 15~20분 정도 소요된다.
자동차를 가지고 간다면 회암사지박물관뿐만 아니라
자생수목원, 장욱진미술관, 청암민속박물관 등 근처 가 볼만 한 곳을 정해 나들이코스를 짜도 좋을 듯 하다.
여의도 면적의 1/2이 넘는 거대한 규모의 절터, 회암사지
국가사적 제128호로 지정된 화암사지는 소실된 회암사의 역사와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조선전기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말인 1326년 인도의 고승인 지공은 고려에 들어와
불법을 전하며 고려 불교계의 큰 스승으로 지내며 충숙왕 15년에 회암사를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공의 제자로는 나옹선사를 두었는데, 나옹선사는 조선 건국에 영향을 끼쳤던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나옹선사가 회암사를 262간의 가람(불교 사원의 건축물을 총칭하는 말)으로 중건하여
경내가 1만평에 이를 정도로 큰 사찰이었음을 유추하게 한다. 당시 3000여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고려사찰의 총본산이었다.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 덕분에 태조 이성계와도 회암사는 관계가 깊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라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회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오랫동안 위세를 떨쳤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스승으로 모셨던 무학대사가 회암사 주지로 있어 자주 찾았으며, 왕위에서 물러난 뒤 회암사에 머무르기도 했다.
회암사의 역사적 기록은
조선 성종 때 간행된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권2에는 고려 명종 4년(1174)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다녀갔다고 나온다.
한편 이색의 ‘목은집’에 실린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회암사의 건물 구조와 배치 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회암사에는 지공·나옹·무학(無學)의 3화상(和尙)의 사리탑이 있고,
절터에는 무학의 부도(보물 388) 및 비(碑),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보물 387),
나옹과 지공의 부도 및 석등, 쌍사자석등(보물 389) 등이 있다.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양식을 따라 건립됐다.
팔각의 지대석 상면에 일석으로 조성된 기단을 놓았다.
이중 중대석은 배가 부른 고복형(鼓腹形)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탑신은 원구형으로, 표면에는 아무 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처마는 전각(轉角)에 이르러 살짝 반전돼 안정감 있는 자태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5개의 보륜(寶輪)과 보주(寶株)가 하나의 석재로 조성됐다. 이같은 승탑의 전면에는 석등이 건립돼 있다.
석등은 평면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의 구성 중 상대석은 하단을 경사지게 처리했다.
화사석은 2매의 판석을 놓아 구성해 화창(火窓)은 앞뒷면에만 개설돼 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의 형태로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추녀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정상에는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株)가 있다.
1372년에 부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유형문화재 제50호)
지공선사 부도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양식을 따라 건립됐는데
팔각의 지대석 상면에 기단을 놓았다.
기단의 각 부재는 하나의 석재로 이뤄졌는데 중대석은 배가 부른 고복형(鼓腹形)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원구형으로 조선된 탑신의 표면에는 아무 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처마는 전각(轉角)에 이르러 살짝 반전됐다.
상면에는 4개의 보륜(寶輪)과 보주(寶株)가 하나의 석재로 조성된 상륜부가 있다.
석등은 평면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의 각 구성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뤄졌는데
모두 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화사석(火舍石)은 2매의 판석을 놓아 구성해 화창(火窓)은 앞뒷면에만 개설돼 있다.
화창의 전면에는 기둥이 모각돼 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의 형태로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추녀는 완만한 U자형을 그리다 전각(轉角)에 이르러 반전(反轉)되고 있다.
정상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받침과 복발(覆鉢) 및 보주(寶株)가 있다.
부도 앞에 건립된 선사의 탑비가 1381년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석등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지 무학대사승탑(보물 제388호)
조선초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1327년∼1405년)는 1398년에 주지직을 사임하고 용문사로 들어갔으며
1402년 다시 회암사 주지에 임명됐으나 다음해 물러나 금강산 진불암으로 들어가 머물다가
1405년 4월 금장암으로 옮겨 그 곳에서 9월11일에 입적했다.
태조실록 및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 등에 의하면 태조는 1397년 경기도 백성을 징발해 미리 무학대사의 부도를 조성했다.
1405년 입적한 이후 1407년에 회암사의 탑에 안장했고 1410년 7월 시호(諡號)를 내렸다고 기록돼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양식을 지닌 승탑으로 외곽에는 팔각형의 난간을 마련했다.
난간은 장대석을 사용해 2단의 기단을 쌓고 각 모서리에는 상면에 보주(寶珠)가 있는 방형의 동자주(童子柱)를 세웠다.
동자주의 사이에는 장방형의 판석을 끼우고 상면에 난간주를 돌렸다.
부도의 지대석은 8각의 각 면에는 굵은 구름문양을 새기고 있다.
하대석은 편구형으로 상면에 복엽8판의 복연(伏蓮)을 새겼는데 각 모서리의 끝에는 귀꽃이 조식돼 있다.
중대석은 고복형(鼓腹形)으로 각 면에는 내면에 화문이 있는 안상(眼象)이 조식돼 있다.
상대석의 하단에는 복엽8판의 앙연(仰蓮)이 조식됐고 각 면에는 장방형의 액(額)내에 당초문을 조각했다.
탑신석은 원형(圓形)으로 구름과 용을 가득 조각했는데 용의 머리와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의 끝에는 용머리가 장식돼 있다.
정상에는 연봉형 보주를 놓았다.
석등은 전체적으로 평면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간주석에 2마리의 사자가 배치돼 쌍사자석등이라 불리우고 있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는 8판의 단판복연(單瓣伏蓮)을 조각했는데, 내면에는 여의두문을 조식하고 있다.
간주석에는 2마리의 사자가 마주보며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양 사자는 뒷발을 웅크려 하대석을 딛고, 앞발과 머리를 올려 상대석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상대석의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받침이 조출됐고 측면에는 복엽 8판의 앙연(仰蓮)이 조식됐다.
화사석은 2매의 판석을 세워 구성해 2면에만 화창(火窓)이 개설됐다. 화사석의 네 모퉁이에는 원형 기둥이 표현돼 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의 형태로 각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정상에는 2단의 원좌(圓座) 상면에 보륜(寶輪)과 보주(寶株)를 놓았다.
무학대사의 입적이 1405년임을 보아 조선시대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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