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언제부터 수목원이 되었는지!
사실 광릉은 '수양대군'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한 조선 7대 왕인 세조와 그의 아내 정희왕후가 잠들어 있는 능이다.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광릉수목원은 왕릉의 부속림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임업 시험림 구실을 해왔기에, 자연이 잘 보전되어 온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세조의 모습은 조카를 죽인 비정한 숙부였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왕권을 강화하고 다양한 제도를 정비해
조선사회 안정의 기틀을 닦아 성종때까지 태평성대를 누리게 했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 광릉을 찾기 전 세조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가면 이야기거리가 많아 좋다.
광릉을 들려 시간이 되면 광릉수목원(미리 예약해야 함)과 봉선사를 들리는 코스로 나들이 코스를 구성할 것을 추천!
세조의 어린 시절....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고 있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세조.
관상과 같은 영화를 보면 무술이 뛰어난 무장처럼 비춰지나, 세조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세종은 문종에게 이르기를 "풍류(樂)를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수양대군 전에 진평대군이라고 불림)뿐이니,
이는 전후에도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절대음감을 인정받았던 사건도 있는데, 세조가 진평대군이었던 시절인 세종23년(1441년) 어느날
문종과 세종을 비롯한 여러 명이 모인 밤어디선가 들려온 휘파람 같은 소리에 진평대군이 음높이를 정확히 맞추었다.
그리고 거문고와 가야금 연주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어릴 적 세조의 연주에 종친들이 모두 감탄했고, 그의 연주 소리를 듣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 춤을 추니
금성대군이 어린 나이에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대군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
문종 때는 관심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공무를 맡아 보기도 했다.
진양대군에서 수양대군으로 이름이 변한 연유~
세조는 어린시절 진양대군으로 불리었다. 세종의 눈에는 첫째 아들인 문종은 문(文)에 뛰어났고,
문장과 서예에 뛰어나 풍류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안평대군과 달리 진양대균인 세조는 욕망을 가지고 있어 보였나 보다.
아버지 세종은 병약한 문종을 보면서, 그의 아들 단종이 어려 걱정이 많았나보다.
그래서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는 진양대군의 이름을 수양대군으로 바꿨다.
아마도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배이와 숙이를 본받길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왕으로 기억되는 세조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일찍이 알고 있던 문종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대신에게 훗날을 부탁한다.
하지만 종친들이 권력이 신하에게 몰리는 것을 반겨할 리가 없다.
단종이 즉위한 지 1년이 지난 무렵인 1453년 10월10일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키게 된다.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자신의 라이벌로 떠오르는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낸다.
수양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한명회는 살생부를 만들어, 수양대군을 따르지 않는 많은 대신들을 모조리 죽인다.
계유정난으로 영의정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하지만 세조 재위 기간 중에 끊임없이 단종을 복위하려는 움직임이 포착!
금성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운동과 사육신 사건, 이시애의 난 등..
이런 복위사건으로 인해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 유배길에 올라야 했고 그 결과 죽음을 맞게 되었다.
세조의 죄책감 ㅠㅠ
세조도 사람인데, 어찌 자신의 조카와 형제를 죽이고 마음이 편할리 없었을 것이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꿈에 자주 나타났다.
꿈에서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는데. 이를 피하려 몸을 돌려 등에 침을 맞았는데
그 부위에 등창이 나 평생 고생했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세조는 현재 광릉이 있는
주엽산 자락을 눈여겨 보고 그곳에 자신의 능을 만들 것을 명했다.
동원이강 형태가 최초로 조영된 왕릉인 광릉
14년간 재위한 세조는 쌍룡농주형(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형상)의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자신의 는을 만들도록 했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덩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자신의 시신이 빨리 썩을 수 있도록 하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회격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무덤 둘레에 12지신 형상으로 세웠던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간석에 12지신 상을 새겨, 간소하게 능을 조성하라고 하였다.
생전에 지은 죄를 씻으려는 마음과 애민정신으로 백성의 부역을 줄이고, 비용을 감축해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가 숨어있던 것이 아닐까!
세조를 예방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동쪽 언덕에 정희왕후가 묻히게 된다.
조선 왕릉 유일하게 하마비가 남아 있는 곳이 광릉이라고 한다.
하마비는 선왕선비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찾는 만큼 왕도 말에서 내려야 하는 장소를 표시한 비석이라 할 수 있다.
하마비에서 쭉 뻗은 숲길을 걸어가면 세조와 정희왕후가 잠든 능의 길목인 홍살문이 보인다.
그 뒤로 제를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과 신주와 제기 등을 두는 집이 양쪽에 있다.
세조의 치적~
세조는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 축소,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약화되었던 왕권을 강화했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백성의 수를 파악할 수있는 호적과 호패제 강화,
전국 방위체제를 편성,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 실시, 현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등
조선 중기까지 태평성대를 위한 토대를 닦았다고 볼 수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돈독한 관계
세조실록에 보면 자신은 "자신은 볼래 색을 좋아하지 않아
술을 마시고 싶으면 예종과 여러 장군과 재상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절대로 궁첩과 더불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로 세조는 후궁을 한 명만 두었고, 술자리에는 조강지처인 정희왕후와 함께 했다고 한다.
정희왕후 이야기
세조의 조강지처로 태조가 승하한 이후 예종이 즉위해 왕태비가 되었다.
내지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는데,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만에 승하하자,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해 성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7년의 수렴청정 기간동안 성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그 이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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