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타고 고고

조선초기 왕자의 난과 회암사

mioki 2017. 6. 2. 03:01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고, 아들도 많았다.

조선을 세울 때 장성한 아들들이 아버지를 도왔다.

목적이 같을 때는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었던 아들들이 왕위를 물려줄 때가 되자,

 조선 건국에 누가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를 생각하며 더 높은 자리를 원하게 된다.



특히 정종과 이방원(태종)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지리산에 침입한 왜군을 무찌르는 등 전쟁터를 누비며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조선을 건국한 뒤 개국공신을 뽑을 때 명단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정도전에게 심한 견제를 받았다.







태조 이성계 또한 신의왕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도움을 줬던 정종과 이방원을 두고,

신의왕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방석(막내였음)을 세자로 삼는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정도전은 방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훗날 문제의 소지가 될 왕자들을 없애려 했다.

태조가 병 때문에 요양을 떠난 사이,


정도전이 왕자들을 불러 없애려는 것을 파악한 정종과 이방원 등의 왕자가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을 죽이고 방번과 방석 두 왕자를 죽인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이후 태조는 힘을 잃고 실권을 방원이 쥐게 된다.


하지만 방원은 두 동생을 죽였기에 왕으로 나서지 못하고 형을 왕으로 세워 1938년 정종이 즉위한다.

 태조 이성계는 아들들이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동생을 죽인 일에 큰 상심과 회한을 느껴 회암사로 거쳐를 옮겼다.

 정종은 실권을 준 방원과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는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두려워

 도읍을 한양에서 개경으로 옮기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을 풀어주는 등 치세를 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방원과 방간이 왕위를 노리고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정종은 결국 1400 11월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시대의 악역을 맡았던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와 정사를 의논하기 위해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를 회암사와 가까운 곳으로 아예 옮겼다.(의정부 지명의 유래이기도 함)


 태조는 1402(태종 2)에 회암사에 머물며 대규모의 중건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무학대사를 위해 생전에 미리 승탑을 조성하게 했다. 이후 무학대사가 입적하자 탑에 안치하고 탑비를 세워 위로했다.





불교 탄압에도 왕실의 원찰로 번영을 이어간 회암사


태종은 왕권 확립을 위해 고려시대부터 막대한 부를 쌓았던 불교를 탄압하지만,

 회암사는 예외로 특별조치가 취해져 태조 이후에도 왕실의 원찰로 번영을 이어갔다.


성종이 즉위한 직후인 1472(성종3)부터 13년에 걸친 증축공사로 규모가 더욱 커졌다.

 또한 조선중기 불교의 중흥을 꾀했던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보우의 회암사 주지 취임과 더불어 동방제일의 대가람이란 명성까지 얻었다.






회암사지 발굴현장에서 많은 축대와 계단 구조물이 남아있고

궁궐 지붕에서나 볼 수 있는 잡상과 용봉 문양 막새 등이 출토되어 궁궐 건축과 비슷한 양식으로 보이고 있다.

반면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갖고 있던 터라,

명종 재위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명조실록에 따르면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기록과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진 전란 중에 회암사는 불에 타서 터만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1566년부터 1595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회암사지에서 나온 유물이 전시된 회암사지박물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의하면

회암사는 모두 262칸의 건물과 더불어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부처가 7, 10척 높이의 관음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넓은 사역과 수많은 건물과 불상이 존재했던 사지에 대해서는

 199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회암사지박물관에 있는 회암사 모형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사찰 건축양식을 따르면서도 정치적인 공간을 결합한 건물 배치는 회암사를 왕실 사찰로 보는 증거 중 하나다.


고려시대 궁궐 건축 양식과 비슷하게 남북으로 층층이 단이 있고 남쪽에 회랑을 두었다.

그리고 또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되도록 건물을 배치하되, 가장 북쪽의 정청과 동방장, 서방장은 궁궐의 편전과 침전 형식을 적용했다.


보광전을 포함한 주요 건물 앞에는 의식과 경연 공간인 월대가 조성됐는데,

이는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같은 궁궐의 중심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보광전 주변에서 발굴된 유물 중 청동금탁에는 태조 3(1394) 조선 국왕과 왕현비, 세자 등

왕실 인물이 회암사 불사를 후원한다는 명문이 새겨졌다.


또 궁궐 지붕에 올리던 토수나 잡상 같은 장식 기와, 불교와 무관한

용이나 봉황이 새겨진 기와, 궁궐이나 왕실 원찰 일부 건물에 사용된 청기와,

왕실용 백자 등이 왕실이 후원한 대사찰이었음을 유추하게 한다.